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칭기즈 칸/대중매체 (문단 편집) === 정복자(1956) ===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330px-The_Conqueror_%281956%29_film_poster.jpg]] The Conqueror. 1956년 [[하워드 휴즈]] 제작, 딕 파월 연출, [[존 웨인]], [[수전 헤이워드]] 주연의 미국 영화. [[리 밴 클리프]]가 조연으로 나왔다. 크레딧엔 오르지 않았으나 존 웨인의 장남과 차남도 등장한다. [[화이트워싱]]의 전형적인 예이다. 일단 포스터부터 고증은 개나 줘 버리는 복장과 배경. 작품은 개봉 당시부터 엄청난 혹평을 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최악의 영화 최상위권에 들고 있다. 존 웨인은 이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매우 공을 들였는데, 크게 잘못된 배역 선정이었다는 게 중론이며 영화 실패의 가장 큰 요인으로 여겨지고 있다. 심지어 존 웨인은 최악의 망작을 뽑는 골든 터키 어워드(Golden Turkey Award)의 1980년 시상식에서 사후 수상이란 영예까지 누렸다. 그래도 9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준수하게 흥행했으나 제작비가 600만 달러라 적자를 봤다. 이 작품을 비롯해 [[존 웨인]]과 [[재넛 리]]가 나온 (1957) 등 몇 편이 흑자를 보는 데 연이어 실패하면서 [[RKO]]가 무너져내리게 된다. [[네바다 핵실험장]]에서 나온 방사성 [[낙진]]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모이던 장소인 [[유타주]] 세인트 조지에서 영화를 찍어서 [[존 웨인]]이 암에 걸렸다는 [[http://www.telegraph.co.uk/film/the-conqueror/making-of-movie-that-killed-john-wayne/|이론]]이 있다. 존 웨인은 이를 부정했으나 1981년 조사 당시 참여 배우와 스태프 총 220명 중 46명이 이미 암으로 사망한 상태였고 91명이 암에 걸려있었다. 감독 딕 파월과 상대역 [[수전 헤이워드]]도 50대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. 재미있는 점은 이 영화가 유독 한국에서 크게 성공했다는 사실이다. 1958년 첫개봉 당시 명보극장에서만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그 해의 흥행 1위를 기록하는 등 대히트를 쳤고, 1977년에도 재개봉하여 서울과 부산에서 40만에 달하는 관객을 동원하여 알짜배기 성공을 거두었다. 그 인기가 얼마나 굉장했는지 황당하게도 몇 년 후인 1963년, 한국에서 배우 [[박노식(1930)|박노식]]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아류작인 《광야의 왕자 대 징기스칸》이라는 영화까지 제작될 정도였다. 1982년 11월 27일 [[주말의 명화]] 시간에 더빙 방영했고 여러 번 지상파 방영 및 2000년대에도 케이블 영화 방송으로 자막판이 방영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